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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기 동영상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05부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6
이번에는 유튜브 인기 동영상에 대해서 리뷰해보겠습니다.
요즘에는 다들 유튜브 볼때 좋은 내용의 영상이더라도 영상이 너무 길면 건너뛰기 하거나, 안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인터넷 뉴스나 유튜브를 볼때 스크롤해서 댓글 먼저 보시는 분들 많으신가요?
바쁜 현대인들의 시간절약을 위해서 유튜브 인기 동영상의 중요 내용이나 요약, 공감 댓글 등을 먼저 확인해보고 유튜브를 시청해보는건 어떨까요?
(추천)인기 동영상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05부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6
https://www.youtube.com/watch?v=3QVezUOR0Tw
요약 댓글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05부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6
건강이 최고
재생시간 댓글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05부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6
al****:
와 윤지연 아나운서 웃는 거 진짜 예쁘다. 00:12:17
인기순 댓글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05부 일본 전국시대 통일전쟁6
센서****:
내가 아는 전국시대가 아닌데?
마스***:
오우! 오늘 월요일이군요 월요일은 토멘사와함께
관심**:
개꿀잼. 오늘도 완전 몰입함.
티끌***:
잘 봐놓고 개똥철학 늘어놓는 인간들많네 ㅋㅋㅋㅋ
그저 나도 안다고 아우성..
1.삼단사격
삼단사격은 했느냐 안했느냐는 본질이 아닙니다. 삼단사격은 처음 들으면 굉장한 전술적 창안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도 십대 때 이 이야기 처음 읽었을 땐 그랬습니다. 그래서 메이지 유신 때 일본의 군사사에도 수록되고 영화나 드라마에서 유명해졌죠. 하지만 정말 그 시대를 살면서 실전을 하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별로 대단한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활이나 석궁도 그런 식으로 연속발사를 했습니다. 송나라의 무경총요에도 신벽궁을 이용한 삼단사격 방식이 나옵니다.
고로 삼단사격은 천재적 아이디어가 아니라 선택의 문제, 효용성의 문제입니다.
1) 우선 살상률을 놓고 볼 때, 1천명이 일제 사격을 하는 것과 1천명이 3단 사격을 하는 것이 어느 쪽이 명중률, 살상력, 대형파괴력이 높을까? 이건 쉽게 결론이 안나는 문제죠. 실제 유럽에서 여러가지 다단계 사격법이 시행되었는데요, 당시에도 보기만 차이가 날 뿐 실제 위력은 별 차이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건 다단과 다단의 경우고, 삼단사격과 일제 사격을 비교하는 사례는 없는데, 이것도 현장성이 크게 좌우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단사격은 사격 전면이 줄어든다는 단점이 있죠. 좁은 공간에서 적이 밀집대형으로 올 때는 일제사격보다 다단이 유리하겠죠. 고로 시가전, 성문방어 같이 좁은 방어지역에서 유효하고 그런 곳에서 썼다고 하더군요. 기자님이 방송 전에 이 이야기를 했는데 막상 방송에서는 빼 놓고 얘기를 못했습니다.
그런데 나가시노 전투처럼 전투 전면이 넓고, 사거리도 짧을 때 과연 다단사격이 유리할까? 적의 기병이 좁은 종대로 돌격해 온다면 유리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조총이 3천정이 아니라고 보는 설이 거의 유력한데, 500정이나 1천정으로 3단 사격을 하면 조총대의 배치면적이 500m도 안됩니다 그러면 기마대는 그곳으로 굳이 돌진할 필요가 없죠. 방향을 틀어버리면 조총은 무용지물이 됩니다.
2) 살상률이 목적이 아니라 총성으로 적의 사기를 꺾고 돌진을 저지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다단사격의 중요한 용도는 끊임없는 총성과 총연으로 적을 위협하는 겁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발사 간격이 짧고 연속으로 진행하는 것이 중요하겠죠. 그런데 화승총은 1분에 1,2발입니다. 더 빨리 쏠 수도 있다고 하지만 바람이 불어도 타격을 받아서 실제 전장에서는 그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따라서 교대 사격을 할 수도 있지만, 머스켓이 아닌 화승총 단계에서는 3단이든 2단이든 영화에서 보듯이 연속적인 일제사격은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사격간격도 너무 길구요. 또 조총대의 횡렬이 줄어드는 문제는 1)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남습니다.
<결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삼단사격은 그리 중요한 획기적이거나 천재적인 전술이 아니라는 겁니다. 물론 이단이든 삼단이든 그런 사격을 위해서는 많은 훈련과 준비가 필요했겠지만, 망조가 든 군대가 아니라면 당시에 그 정도는 해야 했겠죠. 정작 중요한 문제는 화승총을 가지고, 또는 나가시노 전투에서 삼단사격이 효과적이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조총의 수, 다케다 기마대의 규모와 전술이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사료에도 등장하지 않고, 정황증거도 그렇고, 조총의 성능으로 봐도 그렇고 노부나가 군대가 삼단사격을 연습했다고 해도 여기서 사용했을 지는 의문입니다. 그러므로 삼단사격의 존재 여부가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는 있는데, 너무 큰 의미는 부여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삼단사격을 했다고 해서 전술적 천재, 창안, 대단한 전술이라고 찬탄할 필요도 없고, 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럼 그렇지 제까짓 것들이라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냐옹***:
윤아나님이 너무 귀엽게 '이번 댓글 난 안볼란다' 하시는 말씀 듣고, 안봤으면 큰일날 뻔 했네요. ㅋㅋㅋ 박사님과 기자님께서 직접 댓글까지 달아주시니 숨어계시던 고수님들도 수면위로 올라오시고. 댓글들의 수준도 갈수록 매우 높아져서, 임박사님께서 항상 강조하시는 '역사에 존재하는 다양한 설들' 을 만날 수 있을 정도니, 너무 유익하네요.
Hi**********:
스페인 테르시오도 전장을 질타한 무적의 전술이고 스패인은 테르시오만 쓴것처럼 알려져있는데 사실 실제 전투에서 활약한 예는 많지 않고 스페인의 주 전술은 전장을 선점해 거점을 잡고 야전진지를 축성해 버티면서 니가와 전법으로 주로 재미를 봤습니다.
wh*******:
토크멘토리를 보면 아 진짜... 역사를 보는 다른 통찰력이 생기는거 같다..너무 좋아...
달봄**:
아........그르면 이게 어느 정도 설명이 되는 부분이 아닐까 합니다
임용한 박사님과 이세환 기자님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보자면
조선이 보면 화약무기가 등장을 하고 개발이 되고 총통등록을 편찬해서 나름에 표준화를 했지만 제가 알고 있기를
조선이 전국에 화약무기를 보급을 안한걸로 알고 있거든요 옛날에는 왜 그걸 안했을까 많이 궁금했었는데
초석을 구하는 것이 그렇게 어려웠다면 조선 또한 역시 화약을 만드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이 드네요
더군다나 조선의 주 경제력이 농업임을 가만을 한다면 농업국가인 조선이 대량의 화약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부터가
의구심이 들어가네요
화포를 많이 만들어봤자 정작 중요한 화약이 만들기가 어려우니 전국에 보급을 못 했던건 당연한 결과가 아니였나 싶어요
그리고 임진왜란을 배우다 보면 항상 하는 말이 일본군이 조총을 앞세운 전략으로 조선군이 패배를 했다
이 말이 많이 나오는데 영상에 봤듯이 그리고 박사님과 기자님의 설명으로 볼때 임진왜란 때도 일본군이 조선군에게 승리를
할 수 있었던것은 오로지 조총 때문이 아니라 전국시대를 거치면서 숙달된 병사 한명한명의 숙련도와 전술적 능력이
뛰어나서 승리를 한 것이지 이게 조총 때문에 조선군이 패배를 했다는 것은 조선이 전쟁이 끝나고 나서 조선군이 전쟁
초기 패배의 요인을 조총에다가 그 포커스를 맞춘게 아닐까 생각이 되네요
마*:
그만!! 그만하세요 ㅜㅜ
너무 많은 팩폭을 받아서 숨쉬기가 힘드네요
잠시 정지 누르고 혼자 있겠습니다 ㅜㅜ
무지***:
ㅋㅋㅋ 진짜 재미있게 보다가 허를 찔렸네 ㅋㅋ 허무;; 담주 또 기대합니다~
Hi**********:
일본에 무사계급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헤이안시대 말기로 관서를 중심으로 하던 율령제 정권이 동부를 정벌했는데 도보전 중심이던 율령군이 마상전 중심이던 에미시들에게 고전하자 율령군들이 에미시들의 무기와 전술체계를 받아들이고 정벌 후 새로 생긴 토지를 개척하고 경영하면서 무사계급이 발생했다고 보는 관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농민징집병의 율령군이나 국가에 소속된 공무원인 무관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전문무사집단으로 에미시들의 마상전 전슬을 받아들였고 마상활쏘기를 통한 개개인의 단독전투가 주된 전술이 되었습니다.
율령을 통한 중앙집권이 무너지고 봉건제가 성립되자 무사들의 고용관계는 무사들 개개인이 전투를 통해 전공을 세우고 이를 고용주에게 인정받아 포상받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프리랜서와 같은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무사들의 갑옷과 투구는 점점 화려해지고 요란스러워집니다. 일본의 갑옷들이 방어력과 하등 상관없는 울긋불긋한 실을 밖으로 빼내어 화려하게 치장하고 투구들이 높고 뾰족한 뿔이 달리거나 커다란 사슴뿔같은 요란스런 장식이 달린 것도 자신의 싸움을 주변의 아군에게 알려 지신의 전공이 널리 퍼져 고용주에게 증명가능하게 만들거나 고용주가 직접 볼수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다이묘들이 요란스런 갑옷을 입은것도 너희들의 주공이 여기 버티고 서서 너희를 지휘하고 있으니 용기내서 싸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특성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것이 나노리 풍습인데 나노리란 가마쿠라시대 무사들이 전투가 시작되면 말잡이 시종과 함께 앞으로 뛰어나가 자신의 이름 가문 자신의 전공 자신의 정당성과 상대의 부당함을 역설하여 아군의 사기를 높이고 적근의 사기를 낮추고 자신의 이름을 아군과 적군에게 각인시키고 자신의 싸움을 아군과 고용주에게 보여주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고 자신의 밥값이 아깝지 않음을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싸움은 단기전투로 마상활쏘기였으며 가마쿠라시대 무사들의 주무기는 활이었고 칼은 보조무기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이시대부터 무사들을 유미토리 그러니까 활잡이라고 불렀으며 전국시대까지 이 명칭은 유지되어 동해도 지방을 제패한 무사를 동해도 제일의 유미토리라고 불렀습니다. 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받은 호칭이기도 합니다. 이런 무사중심의 단기전투는 여명연힙군의 원정으로 된서리를 맞는데 전세계를 돌아다니며 온갖국가와 민족들을 후드려패고 갈아마시던 몽골과 이들과 싸웠던 고려 앞에 웬 요란한 뿔달린 갑옷입은 놈 하나가 말타고 뛰어나와서 허공에 명적한대 쏘고 중얼중얼 대는 짓거리를 하는 겁니다. 일본군 입장에서야 와 대단히 멋들어진 나노리구나 싶겠지만 여몽연합군 앞에선 나 죽여줍쇼하는 짓밖에 안되었습니다. 여몽연함군은 나노리언들에게 폭탄이나 화살로 벌집을 만들어주거나 우르르 돌격해 썰어버리는 식으로 보답했습니다. 이런 나노리 풍습은 가마쿠라 막부가 붕괴되고 남북조시대가 되어 마상 개별전투에서 도보 집단전으로 전투의 증심이 옮겨가자 점차 약해집니다.전국시대가 되면 가마쿠라시대의 장황한 나노리 대신 이름을 주고받는 정도로 간략화 되고 자신의 증명은 투구와 갑옷이 떠맡습니다. 이라한 나노리풍습이나 요란한 갑옷은 수시로 주군에게 자신을 증명하고 경력을 쌓아 홍보할 팔요가 있는 봉건제적 특성이 낳은 결과물입니다. 유럽에서도 기사들이 통성명하거나 방패에,자신의 가문 문장을 새겨넣어 출전하는 것이 비슷한 예입니다.
한편으로 이렇게 전투양상이 마상궁시를 통한 개별전투에서 도보집단전 양상으로 바뀌면서 일본에서 말탄 무사는 신분높은 고위무사랄 지칭하는 말쯤으로 바뀌어갑니다. 일본의 전국시대 표준적 전투전개는 총병이나 궁병이 전열 앞으로 나가 적진에ㅡ사격하고 장창 아시가루들이 앞으로 나가 길고 얇은 전열을 짜서 합을 맞춰 장창을 내려치는 식으로 전열힘싸움을 했고 적이 무너지기 시작하면 대기하던 무사들이 협견이라고 줄리는 종자들과 함께 달려가 결정타를 주는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조선측 기록인 징비록에도 이런식의 전투전개를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가마쿠라 시대의 표준적 전투 방식이 마상사격이고 이후 도보집단전으로 전투방식이 바뀌고 말탄 무사가 신분적 호칭쯤으로ㅜ바뀐 것을 볼때 일본에서 기병집단이 전열을 짜 돌격하는 충격기병의 집단전술은 부재했고 너그럽게 봐도 궁기병집단정도가 최대한이었단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일본의 말을 봐도 알수있는데,일본의 말은 섬나리에서 유전자 유입없이 열화하여 유럽기준으로 포니정도의 소형마로 힘과 체력이 약해 갑옷을 입고 중무장한 무사가 탑승하면 사람보다 느린 경우도 있었다고 할 정도였다니 순간적인 힘과 돌파력이 중요한 충격기병에 적절하지 못했다고 볼수 있습니다. 일본에 충격기병이 없었다는 가장 큰 증거로 유럽과의 장창병포진차리를 보면 알수있습니다. 유럽의 장창병들이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중장기병의 돌격을 막기위해 무기의 접촉면을 희생하더라도 종심을 깊게 한 장창방진을 짜 수세적으로 운용된 반면 일본은 2,3열의 매우 얇은 전열을 짜 길게 늘어서서 장창을 내려치며 공세적인 힘싸움을 했습니다. 일본은 조선에 와 명군의 타타르 기병대의 돌격에 혼쭐이 났는데 이들의 전술이 기병집단의 돌격에 내성이 약했다는 증명일 것네입니다.
마찬가지로 조총전술도 기병전술의 부재때문에 유럽과는 다르게 발전되어갔는데 유럽이 기병돌격을 대비해 속사에 중점을 둔 전투교리로 발전해간 반면 일본은 기병돌격의 걱정이 없어 보다 느슨한 개별조준사격에 방점을 둔 방식으로 발전해 갑니다. 유럽이 사격예비동작이 60에서70여개까지에,이를정도로 빡빡하게 구분해 일치된 동작과 빠른 재장전을 중시한 반면 조선과 일본은 10에서 20여개 정도로 구븐되어 개개인의 재량에 맡기는 걍향이 강했다느것을 보면 알수 있습니다.
일본의 조총전술이 이런식으로 발전한건 다른 이유도 있는데 일본은 영상에도 나왔듯 전국시대엔 초석을 전량 수입했을 정도로 비싸고 귀한 물자였습니다. 이런 귀한 초석으로 만든 화약을 되는대로 뻥뻥 쏴대는건 영주님들 입장에선 피눈물 나는 일이었을테고 그래서 한발한발 최대한 맞춰 화약이 아깝지 않게 하는것을 선호했습니다.
그리고 전공체계도 있는데 동아시아의 전공체계는 적을 죽여 수급을 확인해 전공을 인정받고 포상받는 방식입니다. 앞서 말했듯 봉건제 일본에서 전공확인은 무사들의 밥벌이와 직결되는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어떻게 누구를 쏘아죽였는자 확인하는 일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무사들은 집단사격보다는 개인 조준사격을 선호했습니다. 일본에서 대형조총인 오오츠츠가 아닌 대포사용이 확인되는 것도 오사카성 전투가 처음인데 무사들이 공용화기인 대포보다 개인화기인 조총을 선호했기 때문인갓도 한 요인입니다.
물론 아시가루들은 집단사격을 했지만 이조차도 우럽에 비하면 느슨한 형태였다고 합니다.
왜란으로 일본의 화기전술을 도입한 조선도 마찬가지 방향성을 보였는데 호란에서 광교산이나 유림 지휘한 전투의 예에서 보듯 험지에 베치돤 총병의 청군 기병을 상대로 한 근거리 집단사격이 탁월한 효과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전훈은 이어지지 못하고 나선정벌에서는 이전과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사격실력 위주로 병력을 선발하기더 했습니다.
3단철포대같은 교대사격전술도 석궁처럼 재장전 시간이 긴 무기를 사용해본 경험이 있는 국가라면 어렵지않게 쓰는 전술입니다. 그러나 이런 교대사격전술은 기병이 돌격해올때빠른시간내에 소규모 표적에 연속적으로 화력을 뿜어 돌격을 막는게 요점인데 일본에 충격기병의 존재자체가 의심받는 상황에 교대사격전술이 의미가 있느냐의 문제가 있습니다. 100정의 총이 있다면 3열로 나누어 편성할 경우 회당30정의 화력만 투사가능하므로 화력이 분산됩니다. 일본이 대단히 조총이 풍부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있다만 초석수급 문제도 있고 조총 자체도 비싸며 일본의 병력동원 기준을 보년 600석 이상의 영주부터 조총병을 동원할 의무가 있늩 것을 보면 화력분산을 감수할만큼 동원가능가능한 조총수량이 넉넉하지 않았단 것으로 보입니다..
인문******:
다케다 기마대
다케다 군의 기마대 이야기가 방송에서 명확하게 매듭짓지 못한 느낌이 있어서 말씀드립니다
기마대가 있었다 없었다는 과도한 결론이라고 생각됩니다. 기병의 존재는 분명히 있었다고 봐야죠. 문제는 기병의 전술, 규모, 타케다 기마대의 특별함입니다. 그들이 몽골군처럼 기동전을 했을까? 아닌 것 같죠. 유럽중장기병대처럼 밀집대형으로 충격작전을 펼쳤을까? 역시 아닌 듯 합니다. 그럼 기병이 없었을까? 전국시대에 기병은 분명히 있었고, 전술적 역할을 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는 기병전이 없는거죠. 그리고 많은 분들이 잘못 알고 있는데, 기병은 좁은 공간에서, 산비탈에서도 사용합니다. 기병의 장점이나 용도는 영화같은 기병돌격만이 아닙니다.
일본의 기병전술을 모르는 상황에서 영화 드라마에서 과장이 되었는데, 우리가 사용법을 모르고, 아는 것처럼 과장되었다는 거죠. 혹 말에서 내려 말을 붙잡고 싸웠다는 기록이 기마대가 없었다는 증거라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그 역시 우리가 기병의 전술과 전투법을 머리로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기병이 진형 안으로 들어가 난전이 벌어지면 말에서 내려서 싸우는 경우도 많습니다. 무엇보다도 옛날 전쟁이 영화처럼 마구 죽이고 헤치고 나가지 않습니다. 관우나 조자룡은 그랬을지 몰라도 보통 일반 병사는 대형이나 기세로 밀고 나가면서 보통 병사는 한 명만 처리해도 대단한 겁니다. 그리고는 창 부러지고 말이 도주하고 해서 더 싸울 수 없게 되도 상관없는거죠. 그러므로 어떤 한개의 기록으로 전체를 재단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참고로 다케다 종가는 대가 끊겼으나 분가가 살아남아 에도시대에 하타모토집안으로 21세기 현재까지 살아남죠. 단지 혈족이 아닌 이름만 남음.
우에스기도 마찬가지로 부계혈족이 아닌 이름만 남음.
Mo************:
저는 솔직히 조총 부대의 역할이 그다지 과장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물론 당시 사료들과 발굴을 통해 발견한 증거들을 토대로 추측해보자면 조총 부대의 역할이 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저는 그 당시대의 사료를 꼭 일본에서만 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거의 20년 후에 일어났던 임진왜란 당시의 역사 자료들만 봐도 물론 일본군의 보병이 주력을 발휘 했지만 조총의 화력에 대한 얘기도 자주 나옵니다. 신립의 부대도 물론 보병전에서 제일 큰 피해를 봤겠지만 조총 부대에게 사기적으로든 물리적으로든 피해를 크게 본건 사실이고요. 당시 또한 오다 가문이 가장 부유했다는 사실도 염두한다면 충분히 3천은 아니더라도 천, 2천 명의 조총 부대는 통솔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수량 문제 또한 만명, 2만명 등 충분히 의심이 갈만한 숫자이지만 임진왜란 때 조선에 침략한 일본군 수가 몇명이 됩니까? 20만명 이였습니다. 나가시노 전투에서 만명이 사망했다는 말은 솔직히 충분히 가능하다고 볼 수 도 있습니다. 3만명과 만명이 붙었는데 천명이 사상자만이 발생했다는게 말이 될까요? 그리고 역사적으로 봐도 그 이후에 타케다 가문이 어떤 저항도 할 수 없게 되어 결국에는 멸망하게 됬는데 두 세력간의 도합 천명밖에 전사자가 나지 않았다면 당연히 타케다 가문은 부활 할 수 있겠죠. 그리고 제일 유능했던 4명 의 가신중에서 3명이 죽었다고 했는데. 군을 이끄는 가신이 사망할정도의 전투였다면 거의 포위가 되어 섬멸전을 당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저는 충분히 만명의 사상자가 났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기병에 대해서도 말씀을 드렸는데요. 일본의 전통마는 기소 말 뿐만이 아니라 도산코, 키소, 미아키 등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아직 까지 존재하고요. 상식적으로 말이 그래도 말인데 어린아이 뛰는 속도라는게 말이 될까요? 아무리 비유적으로 한 말이라도요. https://www.youtube.com/watch?v=ArV3kxhTeD0 여기 영상에서 보셔도 아시겠지만 저정도 속도면 충분히 기마대가 충격돌파 던 뭐던 활약을 했을 수 있었을 겁니다. 물론 우리가 보통 알고 있듯이 타케다 신겐의 기마병은 무적이였다 라는 말은 과장이 였을 지 모르겠지만 그만큼 기마병을 굉장히 잘 사용했다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봅니다.
토크멘터리 전쟁사 팬으로서 박사님이나 기자님의 발언이 그저 그런 의혹이 있다라는 말을 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사실로 받아드리는 사람이 여러 보이게 이렇게 반박이라도 해봅니다.
국방TV 인기 동영상에 대해서 댓글들을 모아 요약형, 시간대형, 인기순 등으로 알아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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