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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기 동영상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68부 7년 전쟁 프리드리히 최악의 위기 I
 
이번에는 유튜브 인기 동영상에 대해서 리뷰해보겠습니다.
요즘에는 다들 유튜브 볼때 좋은 내용의 영상이더라도 영상이 너무 길면 건너뛰기 하거나, 안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인터넷 뉴스나 유튜브를 볼때 스크롤해서 댓글 먼저 보시는 분들 많으신가요?
바쁜 현대인들의 시간절약을 위해서 유튜브 인기 동영상의 중요 내용이나 요약, 공감 댓글 등을 먼저 확인해보고 유튜브를 시청해보는건 어떨까요?
(추천)인기 동영상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68부 7년 전쟁 프리드리히 최악의 위기 I
https://www.youtube.com/watch?v=PIxVtaF-CQg

 


 

재생시간 댓글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68부 7년 전쟁 프리드리히 최악의 위기 I

Se*******:

28:25 옛날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달빛에만 의존해야 됐을테니
말이 쉽지 불가능에 가까운 전투였을듯..
시골에서 그믐달 떴을 때 산기슥 쳐다보면 진짜 아무것도 안보임;;


토토*:
38:11 자 오늘은 여기까지.ㅋㅋㅋ 이거 왜케 웃기지

Mi***********:
14:15 2차대전때도 소련이 독일군을 몰아내긴 했죠 군인 민간인 합쳐 약 3천만명의 인명을 갈아넣어서 프로이센군의 1/3을 소모시켰으면 어마어마한 전과 맞네요 ㅋ

서*:
40:31 이 동영상은 프랑스인이 싫어합니다.

O*:

25:50 박사님 졸귀 ㅋㅋㅋㅋ


th****************************:

43:57에 나오는 브금 제목 아시는분??


제발 토크멘터리 전쟁사 브금 밑에 좀 표기 해주면 안되나요??


응니*****:
32:08 키스 장군이 저렇게 발언하는거보면 왠지 패튼처럼 한성깔 하실거같음 ㅋㅋㅋㅋㅋ

박진*:
이번 화 하이라이트
30:18
총을 집어라, 맞서 싸워라. 누가 내 말 좀 찾아줘

김주*:

16:35
처음에는 꽁지를 짜르더니 인제는 옆머리마졐ㅋㅋ 너무들하네


Ta**********:
19:18 음... 결과론적인 얘기지만 적은 부대로 러시아군의 보급부대를 습격하고 빠르게 진격해서 러시아군의 퇴로에서 작은 교전을 하거나 외교협상을 하여 폴란드를 쳐서 가지면 이를 인정하겠다고 하면서 빼앗은 보급품의 일부를 돌려줬으면 어땠을까 싶다. 러시아가 얻고 싶은 것은 유럽 내에서의 영향력이었을테니 꼭 오스트리아군과 협상을 할 필요는 없었을테니까. 러시아군이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어려운 군대라면 돌아갈 곳을 만들어줬으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외부의 적이 생기면 오스트리아도 군을 함부로 움직이지 못했을 것이다.

 

 

인기순 댓글 : [국방TV] [토크멘터리 전쟁史] 168부 7년 전쟁 프리드리히 최악의 위기 I

De******:
일주일에 한번은 너무적소. 두번쯤 합시다.

약빤*****:

군대 가서 훈련 받아 보면 다 알죠.
밤에는 10미터 앞의 적도 안 보인다는 것.


니꼬**:
올라왔군요.. 감사합니다 토전사.. 들숨에 건강을 날숨에 부를...

킹아*:
추석 선물 감사합니다 ㅎ

jh***:

역사에 조금 관심만 있던 나를 역덕, 밀덕의 세계로 입문하게 만든 프로그램
아마도 우리나라 역덕, 밀덕들의 비율을 엄청나게 끌어올린 프로그램


js***:
자이드리치는 프로이센의 조자룡같아;;

한잔*****:

다들 즐거운 추석잘 보내세요!
토전사 보면서 밥먹다 숟가락으로 머리맞은 내인생이 슬퍼 대나무숲에 임금님귀는 당나귀귀! 하고 갑니다!


Da********:
국방부에서 한 일 중에 가장 잘 한 일은 토전사를 만든것이다.

li*******:

같은 적과 너무 자주 싸우지 말라.. 곧 적도 배운다 .. 이거 진리인듯 합니다. 이젠 오스트리아가 만만치 않게 되었군요


le***:

https://youtu.be/F35NtD3GZuY
임박사님과 샤를세환의 또다른 스토리 레드피그 아카데미에서 만나보세요


ko****:

자이들리츠는 정말 싸울 맛 났을거 같네요. 자기 스스로가 타이밍 귀신같이 맞춘다는 걸 알고 있었을 거자나요. 결정적 타이밍에 멋진 연설로 장쾌한 기병돌격을 명령하고, 자기 기병대가 적을 썰어버리면서 패배를 무승부로, 무승부를 승리로, 궤멸위기를 질서정연한 패퇴로 막는 걸 해내면서 갠적으로 자부심 쩔었을 거 같습니다. 심지어 프리드리히대왕처럼 국가운명을 책임질 필요도 없었고요


Ja****:
완벽하게 프로이센 멸망스토리가 그려지는 가운데...이런 완벽한 판을 순식간에 뒤집어 엎은 표트르3세 너란놈은 대체...

이승*:
언제 올라올까 기대잔뜩한 아재입니다

el***********:

다운 백작은 한니발에 맞서 싸운 파비우스를 생각나게 하네요. ㅋㅋ


Oi******:
가만 보면 알렉산더나 자이들리츠 같이 분석이 아니라 전장에서 타고난 통찰력이 있는 인간이 있는 모양이네...


그리고 기병에 대해서인데, 사실 인간을 빼놓고 모든 포유류, 파충류는 장기간 달릴수가 없다. 마라톤이란건 인간만이 가능한 능력.. . 체온 상승때문에... 인간만큼 체온 조절 가능한 포유류가 없음. 털없지, 땀구멍 많지, 피부 얇지...

La*************:

헐레벌떡 뛰어와서 좋아요 박고 봅니다


약빤*****:

기병 돌격이란 게 말 입장에선 1km 전력 질주한 것과 같기 때문에 한 번 하면 다신 못 하죠.
말이 땀을 흘릴 정도면 거의 죽는다고 하잖아요.


pe****:

추석이라도 올려준다고 믿고 있었다고!


An**:
계속되는 크고 작은 전투에서 국지는 황폐화되고 갈수록 줄어드는 병력, 보급품과 식량 소모와 조달 문제, 꺾일 줄 모르는 적의 기세와 아군보다 많은 머릿수로 밀어 붙이는 형식으로 전쟁이 장기화가 될 경우 프러시아의 잠정적 패배는 누구나 직감하고 있었을 정도로 상황이 프리드리히에게 악재로 작용하게 됐네요. 연합군의 연합작전이 지금까지는 실패했지만 앞으로 2개국 이상의 군대가 성공적으로 군을 규합 후 프러시아의 약점을 제대로 치고 들어올 경우 프러시아가 아무리 잘 싸워도 궤멸당할 수 밖에없는 심각한 기로에 섰다고 봐야하네요. 악전고투 상황에서도 겉으로 절제되고 흔들림 없는 모습과 강하고 건재한 모습으로 병사들을 추스렸을 프리드리히의 모습이 측은하게 다가옵니다. 잘 싸웠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몸도 마음도 지쳤고 유능한 장교와 수많은 병사와 많은 보급품을 잃었는데다 연합 공격으로 인해 점점 궁지에 몰리는 추세가 되니 마지막에 자결까지 생각하고 유서를 작성하는 등 마음이 무척 심란했을 인간 프리드리히의 뒷모습이 떠올리자니 마음이 애잔하고 뜨겁네요...ㅠㅠ

Br******:

Hmmm, Friedrich the Great was most likely a homosexual. But his sexuality won't tarnish his greatness. :)  

This Wikipedia article about Friedrich II (1712-1786) says:

"Sexual orientation:
Most modern biographers agree that Frederick was primarily homosexual, and that his sexual orientation was central to his life and character.[158][159][160][161][162]After a dispiriting defeat on the battlefield, Frederick wrote: "Fortune has it in for me; she is a woman, and I am not that way inclined."[163]

At age 16, Frederick seems to have embarked upon a youthful affair with Peter Karl Christoph von Keith, a 17-year-old page of his father. Rumors of the liaison spread in the court and the "intimacy" between the two boys provoked the condemnation of even his elder and favorite sister, Wilhelmine,[15] who wrote, "Though I had noticed that he was on more familiar terms with this page than was proper in his position, I did not know how intimate the friendship was."[14] Rumors finally reached King Frederick William, who cultivated an ideal of ultramasculinity in his court, and derided his son's "effeminate" tendencies. As a result, Keith was dismissed from his service to the king and sent away to a regiment by the Dutch border, while Frederick was sent to Wusterhausen in order to "repent of his sin."[15]Frederick's relationship with Hans Hermann von Katte was also believed by King Frederick William to be romantic, a suspicion which enraged him, and he had von Katte put to death.[164]

Frederick's first interview with the philosopher Voltaire (left) in the Duchy of Cleves[165]
Frederick's physician Johann Georg Ritter von Zimmermann claimed that Frederick had suffered a minor deformity during an operation to cure gonorrhea in 1733, and convinced himself that he was impotent, but pretended to be homosexual in order to appear that he was still virile and capable of intercourse, albeit with men. This story is doubted by Wolfgang Burgdorf, who is of the opinion that "Frederick had a physical disgust of women" and therefore "was unable to sleep with them."[160][166] In 1739, Frederick met the Venetian philosopher Francesco Algarotti, and they were both infatuated.[167][168]Frederick planned to make him a count. Challenged by Algarotti that northern Europeans lacked passion, Frederick penned for him an erotic poem which imagined Algarotti in the throes of sexual intercourse with a female partner referred to as Chloris.[SIA disambiguation needed][169] In 1733, Frederick was forced to marry Elisabeth Christine of Brunswick-Bevern, with whom he had no children. He immediately separated from his wife when his father died seven years later. He would later only pay her formal visits once a year.[170] These were on her birthday and were some of the rare occasions when Frederick did not wear military uniform.[171]

William Hogarth's painting The Toilette features a flautist (who stands next to a painting of Zeus, as an eagle, abducting Ganymede), which may be a satirical depiction of Frederick – thereby publicly outing him as a homosexual as early as 1744.[172][173] In the New Palace, his greatest place of residence, Frederick kept the fresco Ganymede Is Introduced to Olympus by Charles Vanloo: "the largest fresco in the largest room in his largest palace", in the words of a biographer.[174]

Frederick certainly spent much of his time at Sanssouci, his favourite residence in Potsdam, in a circle that was exclusively male, though a number of his entourage were married.[175][176] The palace gardens include a Temple of Friendship (built as a memorial to Wilhelmine), which celebrate the homoerotic attachments of Greek Antiquity, and which is decorated with portraits of Orestes and Pylades, amongst others.[177] At Sanssouci, Frederick entertained his most privileged guests, especially the French philosopher Voltaire, whom he asked in 1750 to come to live with him. Their literary correspondence and friendship, which spanned almost 50 years, was marked by mutual intellectual fascination, and began as a flirtation.[178][179] However, in person Frederick found Voltaire difficult to live with, and was often annoyed by Voltaire's many quarrels with his other friends. Voltaire's angry attack on Maupertuis, the President of Frederick's academy, in the form of Le Diatribe du Docteur Akakia provoked Frederick to burn the pamphlet publicly and put Voltaire under house arrest, after which Voltaire left Prussia.

Europe at the time of Frederick's death in 1786, with Brandenburg–Prussia in violet, shows that Prussia's territory has been greatly extended by his Silesian Wars, his inheritance of East Frisia and the First Partition of Poland
In the 1750s Voltaire began writing his Mémoires.[180] The manuscript was stolen and a pirate copy was published in Amsterdam in 1784 as The Private Life of the King of Prussia.[181] In it, Voltaire explicitly detailed Frederick's homosexuality and the circle surrounding him. The revelations and language were strikingly similar to those detailed in a scurrilous pamphlet published in French, in London in 1752.[182] After a temporary cooling of Frederick and Voltaire's friendship, they resumed their correspondence, and aired mutual recriminations, to end as friends once more.[183] A further intimate friendship was with his first valet Michael Gabriel Fredersdorf who, Frederick confided to his diary, had "a very pretty face": Fredersdorf was provided with an estate, and acted as unofficial prime minister.[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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