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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인기 동영상 : [KBS역사저널 그날] KBS 역사스페셜 – 후백제 대왕 견훤, 왜 몰락했는가

 

이번에는 유튜브 인기 동영상에 대해서 리뷰해보겠습니다.

요즘에는 다들 유튜브 볼때 좋은 내용의 영상이더라도 영상이 너무 길면 건너뛰기 하거나, 안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혹시 인터넷 뉴스나 유튜브를 볼때 스크롤해서 댓글 먼저 보시는 분들 많으신가요?
바쁜 현대인들의 시간절약을 위해서 유튜브 인기 동영상의 중요 내용이나 요약, 공감 댓글 등을 먼저 확인해보고 유튜브를 시청해보는건 어떨까요?
(추천)인기 동영상 : [KBS역사저널 그날] KBS 역사스페셜 – 후백제 대왕 견훤, 왜 몰락했는가
https://www.youtube.com/watch?v=f_Py8scLD2c
 

 

요약 댓글 : [KBS역사저널 그날] KBS 역사스페셜 – 후백제 대왕 견훤, 왜 몰락했는가

오빠******:

실제로 신라가 반쪽짜리 통일후(출처:제왕운기)

신라영토내 인구비율을 보면 신라계는 3번째임
1. 백제계 - 320만명

(멸망전후로 100여년간 백제본토 전체인구의 절반가까이 일본으로 망명)

2.고구려계 - 150만명

(고구려멸명후 고구려본토 전체인구의 1/3이 신라로 유입)

3.흉노계 - 100만(이건 다른설명이 안나옴)

4.신라계 - 80만명

(통일전에도 삼국중에 인구가 현저히 낮았음)

정확히 말하면 저 당시 신라인구가 적은건 아님 왜(일본)와 비교해도 저 당시엔 신라인구랑 비슷했음 단지 백제의 인구가 엄청 많았다는거 하지만 백제가 멸망하고 전후 약 100년동안 충청,전라지역의 전체인구의 절반이 일본으로 망명함 제왕운기에 자세히 기록되있음
이는 그 당시 신라전체인구의 1/4에 해당...국가 전체가 휘청일정도...이를 계기로 신라내에서 백제계의 정계진출을 가능케한 계기가됨


이동*:
견훤과 이성계의 공통점:
1. 둘다 장군 출신이다.
2. 둘다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세우다
3. 둘다 건국군주 이다.
4. 둘다 후계자를 잘못 세웠다.(둘째 부인의 자식을 후계자로 세움.)
차이점:
1. 견훤은 왕건에게 귀화하여 자신의 나라를 박살 내지만 이성계는 그렇지 않았다.
2. 견훤은 자식농사는 아주 망쳤지만 이성계는 그렇지 않았다.(태종 이방원)
3. 견훤은 나중에 나라와 자식을 잃은 슬픔에 화병에 등창을 앓다 비참하게 죽지만 이성계는 나중에 돌아와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가 죽음.

 

 

재생시간 댓글 : [KBS역사저널 그날] KBS 역사스페셜 – 후백제 대왕 견훤, 왜 몰락했는가

풍후**:
21:13 왜 후백제 장군이 왜장 갑주 입고있지

de******:
6:51 뭔 궁이 이리도 초라하냐?

최*:

1:00:00


Mr***:
18:39 대대로 내려오는 족보 깨끗한거 보소 어디서 구라질이여 저 양반 글씨도 못알아볼정도로 그리고 책을 넘기면 찢어질정도로 세월이 묻어나도 믿을까 말까인데 아주 윤기가 좌르르 흐르는 책 봐라 대놓고 견씨후손이라고 사기친다

 

 

인기순 댓글 : [KBS역사저널 그날] KBS 역사스페셜 – 후백제 대왕 견훤, 왜 몰락했는가

임소**:

유씨 아자씨 방송은 하지마소 .


HS*:
01년방송이니 유인촌이지 급식들 드럽게 많네 ㅋㅋ

마구*:

수달이가 죽었어!!! 수달이가!!!


새우******:

지금 해설 하는놈 유인촌 맞나?


홍수*:

유인촌 인식 나빠진 이유/ 사깃꾼 이명박이 밑에서 똥 퍼기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촌이만 보면 분뇨냄세


무커****:
수달이가 죽었어 . . .

음유**:

지금은 동고산성 왕궁설도 거의 폐기된 학설이 되었죠. 여기 나오는 동고산성 건물지가 큰 규모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의 성 내부의 면적이나 주변의 입지, 지형을 고려했을 때 왕궁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지금은 동고산성이 전시를 대비한 성과 건물이 아닌가 추정하고, 전주 시내에 왕궁이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지요.


포병***************:
기다리기 너무 힘들어서..KBS앱 깔고 역사스페셜 무료보기 되서 시간 날 때마다 정주행 하고 있음

Ye****:
유인촌 개극혐

Se*******:

이게 무슨 소리야 ! 또 졌어 !


Co*****:

어라 사회자가..


성질 뻗치기 전인가..


마님**:

전라도 사람을 쓰면 안된다는게 통일신라 시대에도 증명되네^^


장취*:
KBS 명작 사극 [삼국기-용의눈물-태조왕건-대조영-정도전], 서인석 (김유신-견훤-최영), 유동근(계백-이방원-이성계), 정태우(방석-최응-검이),길용우 (의자왕-정조-보장왕), 임혁 (양만춘-하륜-대중상), 최수종(왕건-대조영), 김학철(흑수돌-박술희) 등등 여러배우들이 생각나네요

CJ*:
유인촌 얼굴 보기 싫지만, 역사공부 땜시....

6중**:

이정도면 이 채널 매금이 팬이다
백제 신라만 계속올리시네


설*:

역사는 그냥 승자 힘있는자가 쓴소설이다! 유명한 신라말에 천제 학자가 인간은 누구나 죽기에 죽는건 두렵지 않으나 아무리 대의를 가지고 개국을하거나 나라를 번성시켜도
나가가 적도들에게 망하고나면 한낫 도적의 무리로 기록됄까바 혹은 역사에 흔적도 안남고 사라질까바 그것이 두려운것으외다" 라하였다
논산 연무 견횐묘에 일제떄 도굴했는데 일꾼으로 일한 할바버지말이 말 부장품박에 안나오고 동네 전설로 적도들이 시신을 훼손할까바 가묘를 크게 두개세우고 진짜 무덤은 인근 산골에
작게 만들었다. 그리고 지금 논산 훈련소를 지나던 견휜이 연산에서 크게 패하고 낙담하던중 여기가 어디냐고 물으니 마을 주민이 닭다리재라하니 아이고 내 태생이 지네인데
여기서 내가 죽겠구나라며 한탄하였단 전설이있다! 조선시대 풍수지리가가 훈련소 인근 마을을 지나던중 이곳은 사내아이들이 울음소리가 끈임업이 울려퍼진다하여 구자곡이라하였다
실제 이동네에 계백의 동방 매화산성이있었고 황산벌에서 패하고난 잔병들이 일대에서 전투를하였고 후백제또한 황산에서 패하고 완주산 가는 길목에서 배수진을치고 구자곡 일대서 최후를 접전을 벌였서 훈련소 옅 마을이 진등이라 불렸고 한국전쟁떄 훈련소가 생겨서 사내 아이들 소리가 아주 시끄러운 동네이다
훈련소 안쪽 완산주 길목 마을에 지네기골이란 지명이있고 지금도 견횐 후손인 지내기 김씨들이 살고있고 마을 이름이 빈집소에 용룡자를 쓰며 용굴에서 수백년됀 이무기가 목이 잘려 승천하지 못했단 전설이있어 소룡리라 불렸고 보통 장군묘 크기의 왕묘가 있었다.
마을 지명이나 전설은 정복자의 가식으로 지여진 역사책보다 더 현실적이고 정확하게 서민들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니 뭐가 올고 그르겠는가?


버거**:

어휴 역사좋아해서 보러왔다가
유인촌 낱짝보고 끕니다..


차오**:

태조왕건 드라마 걸작중걸작 지금봐도 재미있는드라마 대하드라마 다시부활했으면


도우*:
견훤이 망한 이유: 전라도를 기반으로, 전라도에 수도로 잡고, 전라도 인재를 기용함.

Er*********:

유인촌이 역사스페셜만큼은 참 잘했는데 정치에 뛰어들면서 본색이 다 드러나버렸지 ㅉㅉ 완장차면 사람이 어떻게 변하는지 잘 보여주는 안타까운 사례


Se****:

진흥 매금대왕! 오늘, 내일 열심히 달리자!


po***********:

수달이가 죽엇어!!
수달이가!!


sk**:

견훤이 군웅으로써는 참 아쉬운 점이 시대를 너무 앞서간 측면이 있습니다. 견훤은 굉장히 신중한 사람이었습니다. 892년에 이미 지금의 광주를 점령하고 대왕을 칭했고(견훤의 나이 불과 25세) 900년에 지금의 전주에서 백제왕으로 등극했는데 견훤은 궁예~왕건 세력에 비해 초반 확장에 신중했습니다. 궁예 세력처럼 적당히 기존 세력들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빠른 확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 하나 차근차근 확실하게 굴복시켰음. 물론 견훤 세력 또한 궁예~왕건 세력처럼 본질적으로는 호족연합정권이었지만 왕건이 통일 이후에도 상당기간 사실상 수도 근처지역만을 강력하게 통제했던 것과 달리 견훤은 아들들을 무주도독(오늘날의 전남 지역), 강주도독(오늘날의 서부경남)으로 파견해서 실질적으로 지방의 군권을 행사했을 만큼 지방 장악력이 강했지요. 그 덕분에 고려에 비해 상대적으로 작은 국토와 적은 국력으로 30년 넘게 대등하게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국토에 비해 실제로 동원할 수 있는 국력이 강했던 것입니다. 차지하고 있는 땅이 비옥한 측면 또한 있었고.. 만약 원주의 양길에게 비장 벼슬을 내릴만큼 일찍부터 세력을 떨쳤던 견훤이 궁예~왕건세력처럼 철저히 지역 호족들을 우대해주면서 빠르게 확장하는 전략을 펼쳤더라면 궁예~왕건 세력은 제대로 커보기도 전에 이미 중부지방까지 견훤의 영향권 하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실제로 궁예 피살 이후 왕건에 반발해서 태봉~고려에서 이탈한 공주 일대와 충남남부지역의 호족을 제외한 어지간한 호족들은 일단 왕건에게 먼저 붙어보고 어쩔 수가 없을 때에만 견훤에게 붙는다는 인상입니다. 강주의 왕봉규, 소격달이 가까운 후백제 세력이 아니라 머나먼 곳에 있는 왕건 세력에게 붙었던 것 또한 그렇고 견훤의 후방인 나주가 왕건에게 붙었던 것과 경북 북부의 호족들이 견훤에게 강력하게 저항했던 것 등등 사례들이 있습니다. 결국 그런 점들을 조합해서 보면 견훤은 시대상에 비해 강한 왕권을 처음부터 추구했고, 궁예~왕건은 일단 호족들의 세력을 인정해주고 호족들을 최대한 회유하는 전략이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KBS역사저널 그날 인기 동영상에 대해서 댓글들을 모아 요약형, 시간대형, 인기순 등으로 알아보았습니다.

좋은 영상 혹은 채널인데, 너무 길어서 아쉬웠던 분들은 유튜브 채널이나 동영상 링크를 남겨주시면 블로그 포스팅해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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